항일 원동력은 높은 교육열... 중화학원·소안학교 설립
송내호·송기호·김사홍 교육자로서 항일운동사에 큰 족적

▲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렸으며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소안면민들은 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했다. 이탑은 흰돌과 검은 돌을 넓게 겹쳐쌓아 흰돌은 우리민족의 저항을 검은 돌은 일제의 탄압을 형상화했다.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1886년 7월 25일 소안도. 섬 주민 200여 명이 맹선리 짝지에 집단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이 난 지 2개월 뒤 현장을 조사한 일본영사관 직원은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카무라와 그의 집을 습격해서 일본풍 건물과 가옥 3채를 불태우고 저장 창고에서 술과 된장에서부터 의류, 가재도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불태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국토를 불법으로 유린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삶의 터전인 어장을 지키려는 소안도 주민들의 첫 의거였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1909년 2월 24일 새벽녘 소안도 맹선리를 출발한 작은 배가 3.7km 떨어진 당사도 등대 아래 절벽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일본이 만든 당사도 등대는 조선에서 수탈한 물자를 실어 나르던 일본 상선의 뱃길을 밝히는 역할을 했다.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와 마을 청년 6명이 배에서 내려 바위를 타고 기어올랐다. 잠시 후 네 발의 총성이 어둠을 갈랐다. 등대를 지키던 일본인 간수 등 4명이 죽고 등명기는 바다에 던져졌다. 등대가 불을 밝힌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주민들의 기개를 보여준 이 사건은 본격적인 완도 항일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외딴섬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이 있은 지 10년 뒤 발발한 1919년 3·1운동에 소안도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정태, 백태윤 등이 완도읍 나봉균, 최사열과 함께 완도읍 장날인 3월 15일 거사를 일으켰다. 청년 지식인들이 주도한 이날 시위는 일제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해산됐지만, 유관순 열사가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 날보다 보름이나 빠른 시기였다.

2차 시위는 완도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3월 하순 목포에서 전국의 시위 상황을 접하고 온 차종화가 김우진과 만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다. 4월 7일 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김우진, 차종화, 박응두, 문종렬, 이철암, 김기찬 등이 모여 다음 날로 예정된 시위 계획을 점검했다. 각자 태극기를 준비하고 등교해 운동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가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7일 밤 주민들에게 시위 사실을 알리는 벽보를 붙이다 일제 경찰에 발각돼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매일신보’ 4월 11일자에는 이 사건 직후 해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일부가 완도로 파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시위 주동자였던 김우진, 차종화는 구속돼 그해 4월 22일 광주지법 장흥지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당시 신지면에서도 임재갑, 임재경, 김재교 등이 상산(해발 300m)과 독계령에 태극기를 꽂고 산상(山上) 시위를 벌였다.

1년 뒤 만세운동의 불씨는 고금도에서 다시 타올랐다. 1920년 1월 고금보통학교에 다니던 정학균과 이현렬 홍철수 이수열 등은 고종 황제 서거 1주기인 1월 22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정학균이 기숙사에서 태극기 70장을 만들고 이현렬은 격문을 제작했다. 오전 11시경 덕암산 정상에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그 틈을 타 고금보통학교 앞에서 3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80여 명이 체포됐고, 주동자인 정학균 등 6명은 기소돼 옥고를 치렀다(‘완도군 항일운동사’).

항일 독립운동가 89명 배출

완도군에서 항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소안도다. 항일 독립운동가 89명을 배출했고 이 중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인사만 20명에 달한다. ‘편안히 살 만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소안도(所安島)는 일제강점기에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완도읍 본섬에서 한참 떨어진 데다 인구가 6000여 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교육운동과 노농운동, 비밀결사와 법정투쟁 등을 벌이며 암울하고 참담했던 시기를 꿋꿋하게 버텨냈다.

일제를 상대로 13년의 법정공방 끝에 승소한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이 대표적이다. 1905년 일제가 소안도 주

민의 토지 전체를 몰수해 사도세자의 5대손이자 일제로부터 자작 칭호를 받은 이기용에게 넘겨주자 1909년 소송을 제기해 1921년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기쁨은 사립소안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소안도 주민들은 1913년 문을 연 사립중화학원을 정규 학교로 승격시키기로 하고 1만454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70원인 점을 감안하면 꽤 큰 액수다. 사립소안학교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달지 않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일제는 이 학교를 ‘항일운동의 배후’로 지목하고 1927년 강제 폐교했다.

소안도 주민은 격렬히 저항했고 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탄원서를 돌리기도 했다. 이 일로 주민 800여 명이 불령선인(不逞鮮

人·일제가 자신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을 지칭)으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살자회 등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어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김사홍(1883-1945)                     송내호(1985-1928)             송기호(1900-1928)   

국내 항일운동의 3대 성지

이처럼 항일운동의 시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높은 교육열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완도 유지들은 신학문과 신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1905년 사립육영학교(1911년 완도공립보통학교로 변경)를 시작으로 소안도에 개교한 사립중화학원(사립소안학교 전신), 노화도의 사립영흥학교, 고금도의 약산사립학교 등 근대적인 사립학교가 곳곳에 세워졌다. 당시 사립학교는 근대 민족의식을 키우는 터전이었다. 선각자들의 민족 교육은 청년들이 항일의식을 키우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완도 항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송내호(1895∼1928·건국훈장 애족장)다. 소안도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한 뒤 완도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사립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 사립영흥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1914년 비밀결사체인 ‘수의위친계’를 조직해 완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에까지 인맥을 형성하고 1915년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 그는 1927년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검거돼 옥고를 치르던 중 폐결핵이 악화돼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송기호(1900∼1928·건국훈장 애족장)도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 3·1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됐다. 이 형제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순국했지만 항일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재 국가보훈처로부터 포상을 받은 완도지역 독립유공자는 59명이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사는 이보다 훨씬 많다. 2000년 발간된 ‘완도군 항일운동사’에 완도군의 민족운동가로 소개된 이는 모두 122명이다. 부산 동래, 함경도 북청과 함께 완도가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 김사홍 선생은 1913년 소안면 비자리에 중화학원이 설립하고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항일운동에 선봉에 섰다. 김사홍 선생은 조국의 해방을 못 본 채 1945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소안학교 전신 중화학원 설립자 김사홍

김사홍은(1883∼1945) 한일 합방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게 되자 배움만이 일제를 몰아 낼 수 있다는 이념으로 1913년 김사홍 선생이 주축이 되어 신교육 기관인 중화학원을 세웠다.

사립소안학교의 전신인 중화학원 설립은 소안면민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소안도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중화학원은 9년간 지속되다가 사립소안학교가 설립되자 승계되었다.

사립소안학교는 1922년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에서 승소한 면민들은 당시 소송대표로 공을 쌓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뜻으로 송덕비를 세워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이들은 한사코 사양하면서 그 뜻을 살려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하여 주민들이 의연금(義捐金) 10,400원을 각출하여 사립소안학교를 세웠다.

1922년 5월 1일 인가를 받아 1923년 5월 16일 소안면 가학리에 설립한 이 학교는 초대교장에 중화학원의 설립자이던 김사홍이 취임하고 교사로는 김경천, 강정태, 신동희, 송기호, 최영천, 김형곤, 백태윤, 김병섭, 감남곤, 문남균, 박득수 등 면내 인사와 조선일보 경제부장으로 있던 이시완, 대흥사 수도승 박영희, 이호견 등이 교사로 부임했다.

사립소안학교에 대한 소문이 퍼져 노화, 청산, 해남 심지어 제주에서까지 유학생이 몰려들었다. 교육목표는 중화학원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일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미신타파, 조혼폐지, 언어평등, 남녀평등 등 명실상부한 항일투쟁의 뿌리로 자리 잡았다.

“모든 재산 독립운동에 바친 할아버지 자랑스러워”

인터뷰/ 중화학원 설립자 김사홍 후손, 김진침 전 완도군의회 의원

중화학원 설립자 친 손자인 김진침(77) 전 완도군의회 의원은 “할아버지 나이 30대 시절에 소안도에서 중화학원을 설립하는 등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했다”면서 “할아버지가 항일 운동을 한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고 떳떳하다”고 밝혔다.

김 전 의원은 이어“할아버지는 주민들에게 일본 말과 일본 문화 대신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중화학원을 설립했다”며 “할아버지는 당시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게양하는 등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김사홍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50대에 알았다고 했다. 김 전 군의원은 30대 시절 마을 이장으로 선출됐지만 집안이‘좌익’이라는 이유로 6개월 동안 마을 이장 임명장을 받지 못했다.

또한 김 전 군의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김사홍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직장도 마음대로 구하지 못하고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청년시설을 보냈다.

“소안도의 항일투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문중의 하나가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이었죠. 할아버지께서 1913년 소안면 비자리에 설립한 중화학원은 소안 최초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설립자로서 초대원장에 취임했고, 건학정신은 항일·애국사상 고취와 근대교육 이었습니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중화학원에 몰려들었던 교사들이 모두 항일투쟁의 선봉장이 된 사람들로서 타 지역에서 부임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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