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남 장보고연구회 전 이사장

가리포진이 설진되어 첨사가 첫 발령을 받은 것이 1522년이니 올해로 495년이 되었고, 페진은 1895년 7월15일이다. 페진으로 부터는 122년이 되었으며 228대 첨사를 마지막으로 374년간 첨사진으로 있었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가리포진 성을 복원하고 옛 명성을 찾아 완도의 또 다른 이름인 가리포를 재조명하자고 학술회의를 한다. 이 학술회의를 계기로 가리포에 모든 것을 다 찾았으면 한다.

성의 복원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군청이 옛 동헌의 자리이니, 성내에 있었던 건물들도 모두 복원할 수만 있다면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가리포진지도를 보면 동, 서, 북문은 있는데 남문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림에는 없으나 남문은 폐문루(閉門樓)라 하였으며, 동문은 영일루(迎日樓), 서문은 망미루(望美樓)가 있었고 성서(城西)의 성은단(城隱壇)이 있었다. 그리고 북문은 첨극루(瞻極樓)라고 하였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망왜대(望倭臺)가 있어 여기에 오르면 주변의 해로와 배들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1928년 7월 31일과 8월 1일 2회에 걸쳐서 도서순례기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성내에는 청백당(靑白堂), 책실(冊室), 향사당(鄕社堂), 군관청(軍官廳), 연청(椽廳)과 추청(秋廳), 장방청(長房廳), 관로청(官奴廳), 사령청(使令廳), 습사소(習射所) 등이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첨극루의 첨자가 처다 볼 또는 볼 첨(瞻)자이다. 아마도 각 망산의 봉수대에 연결하여 상황을 알리는 곳이라 이런 글자를 썼을 것으로 본다. 건물들과 같이 지금 내천꼬랑이라고 부르는 곳의 선소와 소가용리에 선소가 있었지만, 원형복원이야 어렵겠지만 표시라도 했으면 한다.

선소가 있었던 것은 이곳 완도에는 배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던 황장목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1460년에 조전선(漕戰船) 100척을 만드는데 여러 고을에서 선장(船匠) 100명, 목장(木匠) 200명을 뽑아서 변산과 완도에 보내라는 기록이 있다.(세조6년(1460) 7월1일)

1476년에는 배 만드는 변산의 소나무가 이미 다 없어져서 완도로 자리를(배 만드는 장소) 옮겼다니 완도가 다 떨어지면(배 만드는 소나무가 다 없어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왕이 걱정했던 기록으로 보아(성종5년(1474)10월28일) 완도에서 배를 만든 일들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완도에는 그만큼 소나무와 배를 만드는 목수들이 많았었음을 알 수가 있다.

1505년에는 전라도에서 보낸 잉박선(芿朴船, 너벅선, 廣舟) 19척, 토선(吐船) 12척, 착어선(捉漁船) 2척을 내수사에 소속시키라고(연산군 11년(1505)8월15일) 했던 것으로 보아 나룻배나 어선까지도 완도에서 만들어 내수사로 보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완도에는 대규묘의 조선소가 있었을 것이고, 선장(船匠)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1596년 윤 8월 24일에 남망산에 올라서 남긴 말들도 있으니 이 모두를 아우르는 복원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지명들도 현재의 것과 병기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즉 우리가 ‘모여’라고 부르는 곳도 가리포진지도 상에는 ‘왜몰여(倭沒礖)’라 되어있고, 지금이야 다 없어졌지만 우리가 ‘공고지’라고 부르는 학림회센타 부근을 ‘왜암(倭岩)’, ‘주도’는 ‘추도(錘島)’, ‘장도’는 ‘장재도( 壯才島)’, ‘큰 개머리’는 ‘대구두곶(大狗頭串)’이라고 했으니 옛 이름도 함께 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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