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남(전 장보고연구회 이사장)

고금도(古今島)는 옛날의 고이도(皐夷島)이다. 장씨(張氏) 딸은 망명인(亡命人) 장현경(張玄慶)의 혈족(血族)이다. 현경은 본래 인동인(仁同人)으로서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장현광(張顯光)의 봉사손(奉祀孫)이다. 가경(嘉慶) 경신년(1800, 순조 즉위년) 여름에 우리 정종대왕께서 돌아가셨는데, 인동 부사(仁同府使) 이갑회(李甲會)가 공제(公除, 국왕이나 왕비가 선왕의 상사에 이일역월(以日易月)로 복을 벗는 것)가 끝나기 며칠 전에 그 아버지 생일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녀(妓女)를 불렀다. 그리고 현경의 부자(父子)에게 함께 와서 놀기를 청하니, 현경의 아버지가 그에게 답하기를,

“공제(公除)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잔치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은 옳지 못하다.”하고, 나가서 이방(吏房)의 아전[首史]에게 말하기를,

“국휼(國恤 국상)이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잔치하고 술을 마시는가? 때를 보아서 하라.”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현경의 아버지는 부사의 아버지와 성(姓)이 다른 친척이었으므로 자주 부중(府中)에 들어가 만나보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현경의 아버지가,“시상(時相)이 역의(逆醫) 심인(沈鏔)을 천거하여 그에게 독약을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 역적을 내 손으로 제거할 수 없다.”하니, 이갑회의 아버지는 그 말에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었다.
그런데 아전이 와서 전하는 말을 듣자, 이갑회는 자기의 죄를 성토하며 모함하려는 것이라 하고 재빨리 감영으로 달려가, 현경이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임금 측근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반역의 기미가 있다고 고(告)하였다. 관찰사(觀察使) 신기(申耆)는, 돌아가서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으라고 명하였다. 갑회가 밤에 잘 훈련된 군교(軍校)와 이졸(吏卒) 2백여 명에게 횃불을 들게 하고 현경의 집을 포위하니 불빛에 밤하늘이 환하였다.
현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랍고 두려워 무슨 변고인지도 모른 채 담장을 넘어 달아났고 그 아우는 벼랑에 떨어져 죽었으며, 그 아버지만이 잡혔다. 갖은 방법으로 다스려도 잡히는 바가 없이 연루자가 수백 인이었으므로 체포하기 위해 사방으로 나가니 온 마을이 소란하여 모두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를 못했다. 그때는 마침 가을이라 목화가 눈처럼 피었으나, 줍는 자가 없어 모두 바람에 불려서 굴러다녔다. 조정에서는 안핵사(按覈使) 이서구(李書九)를 보내어 그 사건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수한 문서(文書)라고는 서지(筮紙) 한 장뿐이었는데, 그 점사(占辭)에는 ‘건마(乾馬)가 서쪽으로 달아났다.’라는 말이 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또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평번(平反)하여 대부분 풀어주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현경은 마침내 망명(亡命)하였으므로 이에 그의 처와 아들딸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귀양보냈다.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이었는데, 큰딸은 22세, 작은 딸은 14세, 사내애는 겨우 10여 세였다. 하루는 진영(鎭營)의 군졸 하나가 술에 취하여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는 말로 그를 꾀었는데, 이 뒤로 계속하여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꾸짖어 말하기를,“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

하였다. 큰딸은 너무도 비분한 나머지 남몰래 항구(港口)로 나아가 조수를 바라보다가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어머니가 재빨리 그녀를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또한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7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때 작은딸이 따라 죽으려 하자 어머니가,“너는 돌아가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하였으므로, 이에 멈추고 뒤따르지 않았다.
돌아가서 보장(堡將)에게 알리니, 보장은 현(縣)에 그 말을 상신하였고, 현감(縣監) 이건식(李健植)은 검시(檢屍)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윽고 수일 후 해남수군사(海南水軍使) 권탁(權逴)이 장계(狀啓)를 올려 신지도(薪智島) 수장(守將)과 지방관인 강진현감을 아울러 파출(罷出)할 것을 청했는데, 이는 고례(故例)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파출당하게 된 건식은 곧 아전과 의논하여 천냥(千兩)을 비장(裨將)에게 뇌물로 주었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을 현에 되돌려주고 장계는 수영(水營)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래서 관(官)은 무사하게 되었고 그 군졸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이듬해 경오년(1810, 순조 10) 7월 28일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파도가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처럼 일었다.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나는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또 이듬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그 바람을 처녀풍(處女風)이라고 하였다. 그 뒤 암행어사(暗行御史) 홍대호(洪大浩)도 그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


*평번(平反): 억울한 옥사를 살펴 그 죄를 감면해 주는 것이다. 한대(漢代)에 유덕(劉德)이란 사람이 관후하여 경조윤(京兆尹)으로 일을 볼 때 평번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漢書 楚元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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