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남(전 장보고연구회 이사장)

우리 완도는 신라 때는 청해진, 조선시대에는 가리포진이었다.

가리포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중종 17년(1522) 5월 7일의 기록에 가리포진이 설진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병조 판서 장순손(張順孫)은 가리포(加里浦) 등에 이미 성(城)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긴요한 방어지이다.

그러므로 관원을 보내어 적간(摘奸, 죄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핌)하도록 하거나 유시(諭示)를 내려야만 그 도(道)에서 반드시 변방을 중시한다는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가리포진이 설진되기 이전에 성을 먼저 쌓았다는 것이 되는데, 고전번역서인 만기요람 군정편 4 관방(關防) 조에 보면 가리진성(加里鎭城)은 석축이며 둘레가 3리(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가리포진이 설진되어서 폐진 되기까지는 371년에 226명의 첨사가 있었다.

그중 마지막 첨사가 명선욱이다. 명첨사가 발령을 받은 것은 고종 30년(1893) 1월 29일의 기록에 명선욱(明瑄煜)을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로 발령을 낸 기록이 있다. 그러나 1591년 2월 2일 이순신이 가리포첨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부임은 하지 않고 전라좌수사로 갔으니 만약 가리포첨사로 본다면 명첨사가 227대 첨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가리포진이 폐진 된 것은 1894년이니 명첨사가 가리포진에 근무한 것은 불과 1년여가 된 것인데 행절제사명공선욱영세불망비를 1894년 10월에 세웠으니 폐진과 동시에 떠나게 됨을 아쉬워하면서 세웠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럼 당시에 가리포진에는 전선(戰船)으로 어떤 배가 얼마나 있었을까?

만기요람 군정편 주사(舟師)조를 보면 가리포(加里浦)에는 전선 1척, 거북선 1척, 병선 2척, 방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으며, 신지도(薪智島)에도 거북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다.

또한 가리포진의 기록 중 비변사등록 영조32년(1756) 6월 18일의 기록에 가리포(加里浦)의 전선(戰船)·귀선(龜船) 각 1척이 일시에 불에 타버린 안타까운 기록과 고종 4년(1867) 6월 17일의 기록에도 가리포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거북선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가리포진의 폐진과 불과 27년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폐진 때까지도 거북선이 있었다고 본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임진전쟁기간 동안 크고 작은 회의에 가리포첨사가 빠진 것이 단 한 번도 없다. 이것은 당시에 가리포진에서 제주도의 대정현까지 관장을 한 큰 진이었기 때문에 가리포진이 매우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옛 흔적들을 찾아본다면 먼저 객사가 있고 가리포진성의 흔적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이를 복원하거나 정비하여 가리포의 옛길이란 이름의 관광코스를 만들 수는 없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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