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우리섬> 고금면 덕동마을

 

덕동마을의 역사는 곧 고금면의 역사와도 같다. 그래서 덕동마을을 말할 때는 고금도의 역사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고금도진의 변화 과정을 풀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고금도의 섬 이름은 ‘고이도’라고 했다고 문헌에 전한다. 이후 차차 조금씩 변해오다가 현재의 이름인 고금도(古今島)라 칭하게 됐다.

고금도진(古今島鎭)이 덕동에 설치되기 전까지의 섬 고금도는 탐진현 장흥부나 강진현 대구면에 귀속된 후미진 남녘땅의 그저 그런 작은 도서에 불과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략의 요충지로 재평가 받은 고금도는 1598년 2월 18일 덕동(德洞)에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본영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해 인근 바다로 건너온 왜적을 전멸할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완도 최대의 충무공 유적 묘당도 역시 바로 옆 자락에 있다.

덕동에는 1600년(宣祖 33년) 처음으로 소모별장(召募別將)진을 두었다가 1673년 다시 별장(別將)진을 두었다. 별장(別將)이라함은 산성(山城), 도진(渡津), 포구(浦口), 보첩(保疊), 소도(小島)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말단 무관직 벼슬이다.

그러다가 1681년 고금도진(鎭)을 덕동에 설치하고 첨사(僉使; 조선시대 진을 관장하는 종4품 군직)를 두어 조약도, 평일도, 생일도 등을 관장하고 해상을 방제케 하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이때 덕동마을을 진리라 불렀다. 얼마 안 돼 생일도, 평일도는 거문도진에 다시 이속됐고 1895년 7월 15일 군제개혁을 계기로 215년간 고금도진이 아예 없어졌다. ‘덕망 있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동리’, ‘고금진의 본진을 덕수(德水)라 해 덕동이라 불렸다’고 전하는 그 덕동마을은 이런 고금 역사의 중심을 관통해왔다.

1896년 완도군이 설군(設郡)될 때까지 농상리에 두었던 고금면사무소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조약면(약산면)을 폐합해 덕동리로 면사무소를 신축 이전했다. 이때부터 덕동마을은 면소재지로서 해방 후 1949년 4월 1일 조약도가 본 면에서 분면 돼 약산면으로 독립할 때까지 상근 집무처가 됐으나 다시 약산면이 떨어져나가면서 덕동마을에 있던 고금면사무소마저 다시 농상리로 이전, 덕동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덕동마을에 가면 지금도 한때 영화로웠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고금어업협동조합과 고금농협, 고금우체국 건물이 폐허로 남아 있고, 마을 중심에는 ‘통샘’과 ‘새샘’이라 불리는 커다란 마을공동우물이 여전히 지키고 섰다.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 세운 애향탑에는 ‘망덕제(望德齊)’를 건립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적고 있다.

덕동마을에서 만난 이연동 노인회장이나 여러 어르신들에게 들어보니 마을이 처음 형성된 시기는 대략 1590년 무렵이라 한다. 또 최초 마을이 형성될 즈음엔 밀양 박씨, 경주 이씨, 동복 오씨가 입주했으나 이후 소모별장(召募別將)진을 시작으로 주요 수군의 진영이 자리 잡으면서 마을이 부흥케 됐다는 것이다.

마을 앞에 천혜의 바다를 둔 덕동마을은 지금도 부유한 어촌이다. 하지만 고금도와 조약도를 함께 아우르는 면 소재지 덕동의 영화로운 흔적을 둘러보다보면, 현 덕동마을의 풍경은 너무 평온하고 또 한가롭다.

그럼에도 취재 과정에서 들어보니 현 지역구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라 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중심에서 면면히 강건한 힘을 키워온 덕동마을의 기운이 아직 다 쇠하지 않은 것일까? 고금 최동단 덕동마을 통샘에 다시 용천수가 분출하는 새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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