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해양수산박물관 유치기념 특별기고

완도군이 지난 10월 17일 국립해양수산박물관 건립 예정지로 확정됐다. 이에 많은 군민들이 환호했으나 정작 해양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인식이 유치 열기만큼 높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정영래 전 완도문화원장의 원고를 통해 완도 군민에게는 자긍심과 교훈을 제공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완도군 발전을 위한 의지를 모아 완도국립해양수산박물관이 향후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반응이다. 향토사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중인 정영래 전 문화원장의 세계해양사와 완도 해조류 이야기를 연재하니 독자 재현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 편집자 주

 

정영래 前 완도문화원장

해양은 전 세계가 공유하고 유통할 수 있는 통로이다. 세계정세는 해양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위상과 부가 결정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국민은 역사와 정체성면에서 몇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해양활동이 발달하지 못했거나 아예 없었다고 믿는 일이다. 둘째, 대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해양을 버려두었다. 셋째, 주변국의 위세에 억눌러 우리 스스로를 낮추어 보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교육에 문제가 있었다. 국민의식이 우리 것은 미천하고 남의 것이 좋다는 의식은 중국과 일본의 사대주의에서 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에서 고구려 시대에는 중국을 호령하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백제시대에는 중국의 영토까지 우리가 경영하였던 역사를 가지고 중국까지 왕래하려면 당연히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해양국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이 망하고 바로 등장한 나라가 발해이다. 발해는 중국에서 인정한 명칭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다. 해양국가였다는 뜻이다. 그 후 우리는 쫄아들고 줄어져 반도에 갇히면서 의식까지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흔히 세계사를 비교할 때 유럽 역사를 우선하며 동양 역사 중에서 중국의 역사를 앞에 두고 그 뒤 순서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로 배우고 알아왔다. 그러나 세계 해양역사에서만은 한국이 앞섰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 

세계 해양사를 이야기하면 첫 번째 등장한 것이 유럽의 바이킹이다. 

바이킹!
기원후 8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유럽에서 발생했던 해적의 역사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노르만족은 당시 농경사회가 발전할 때 북으로는 빙하이고 남으로는 바다이기 때문에 농토가 없었다. 농토의 땅을 찾아 배를 따고 남으로 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남쪽에는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해적 노략질을 하게 된다. 이것이 해양역사가 되어 유럽의 노르만족 바이킹은 해적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남들이 개척하지 못한 해양을 개척하여 살아 보자고 노력한 결과가 해적이 되었으며 해양개척역사가 됐다.


버이킹은 눈에 보이는 곳 이라면 무조건 쳐들어가 약탈했다. 전쟁이 없이 살아오던 연안민들은 속수무책 당했다. 바이킹의 항해술은 지문(地文)항해 수준이었다. 
이 시절 동양에서는 유럽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당나라 시절이다. 중국의 당나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살던 나라로 인식돼 있었다. 당나라에는 장보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장보고!
바이킹이 해적으로 노략질을 할 때 장보고는 무역을 하기 위해 사단(斜斷)항로를 개척하면서 이곳에 출몰하고 있던 해적들을 소탕하는 국제해양경찰의 임무를 수행하고, 해적은 완전 소탕한 다음 이곳의 명칭을 청해(淸海)라 했다. 靑은 맑고 깨끗하며 사념이 없다는 뜻으로 홍익인간과 같은 뜻이다. “맑고 깨끗한 바다 淸海”라는 명칭은 세계에 없다.


바이킹의 해적선 규모는 길이가 25m 정도이며 선원은 약 25명 정도로 한 선단이 5척에서 10척으로 기록되고 있다. 장보고 선단의 선박은 길이가 30m 정도이며 선원이 30명 정도이고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공간까지 약 50톤 규모로 당시 세계 제일의 무역선이었다.

선단의 규모는 견당선이라고 하여 신라에서 직접지은 선박이 5-6척 장보고가 직접 운영하는 선박 교관선이 5-6척으로 10여 척의 선박을 장보고가 모두 경영했다.(엔닌 일기 참고) 두 선박의 구조나 규모 면에서 바이킹 보다는 장보고 선단이 우수했다는 것이 증명되며 해적질과 해적소탕이라는 세계질서 이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해양의 운영은 조선술과 항해술이다. 조선술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완벽한 선박의 확보이며 항해술은 대양을 항해하는 기술이다. 라이샤워는 당시 장보고를 “세계 최초의 해상무역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라나 “장보고는 바다의 제왕이며 해양영웅이다.”
장보고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당시 세계 제일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도 차고 넘친다.

장보고의 항해술을 살펴보자.

장보고는 9세기 초 (828년) 중국과 청해진을 잇는 동중국해 사단항로를 개척해 나침반도 없이 해와 달과 북두칠성만으로 방위를 측정해 중국의 절강성에서 청해진까지 정확하게 운행했다.

그리고 조선술을 알아보자.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일본은 조선술이 미약해 해외로의 진출은 신라에 의존했다. 헤이안시대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년 - 806년 음력 3월 17일 양력 4월 9일), 재위 801년-806년)은 “신라에 들어가 백제선을 구입해여 오던지 조선(造船)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배를 짓도록 하라” 지시한다. 일본의 선박으로는 중국을 왕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국으로 가려면 신라로 와서 신라 선박을 대여하던지 붙여가는 형식으로 중국을 왕래했다.

당시 장보고 선단에 의해 왕래할 수 있었다. 그처럼 당시 신라 선박은 우수했다. 천문항해로 운항시간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만이 할 수 있었던 혁명이다. 당시 청해진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살았다. 세계가 주목하던 당나라보다 청해진이 잘 살았던 것은 당나라에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서웠으나 청해진에는 세금이 없었다. 

“일 자리가 넘쳐났다. 모두가 빙그레 웃었다.”

다음호 (동서양의 해양사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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