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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으로 배우는 완도…명사십리(鳴沙十里) 해수욕장
박상석 기자  |  wandost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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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28  12: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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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지명사십리의 지명에는 이세보의 유배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완도 사람이면 누구라도 신지도에 소재한 명사십리 해수욕장(명사장; 鳴沙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상산과 함께 신지도의 상징물로 꼽히고 있는 신지 해수욕장은 모래가 우는 멋진 백사장이 십리에 걸쳐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해서 ‘명사십리(鳴沙十里)’라 부른다. 모래가 울다니…. 혹자는 파도에 밀려 왔다가 다시 쓸려 내려가며 내는 소리를 지칭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모래를 밟을 때 나는 소리라고도 해석한다.

하지만, 신지도 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구전으로 전해들은 해석은 이와 사뭇 다르다. 주민들 이 전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조선 말기 25대 철종의 종제인 경평군 이세보가 왕족이라는 이유로 까닭 없이 안동김씨 세력들에 의해 신지도 대평리에 귀양살이를 오게 된 뒤 밤마다 모래등에 주저앉아 백사장에 손가락 글씨로 망향의 시를 써 내리며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결국 이세보는 병을 얻어 외딴 섬에서 죽게 됐는데, 이때부터 신지 명사장의 모래들이 밤마다 이세보의 한이 서린 울부짖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리게 됐다는 것이다.

얘기가 그럴 듯한 것이 신지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명사십리 동쪽 끝자락 마을은 지금도 ‘울모래’ 또는 ‘울몰’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으며, 이곳이 바로 이세보가 귀향살이를 했던 마을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시조가로 익숙한 이세보는 고종 즉위년인 1863년 유배지에서 풀려나 오위도총부, 한성부판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 판의금부사가 돼 1894년(고종 31)까지 조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측은지심 탓일까? 하지만 이를 어찌해야 할까. 명사십리에 얽인 주민들의 구전 내용은 이세보의 억울한 마음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쪽으로만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다르게 다르게 자꾸만 ‘남의 살’이 덧붙여지며 설화처럼 변해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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