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조선 후기 진린에 대한 인식과 선양

청산도 진린도독비의 건립과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풀이한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의 논문이 공개돼 화제다. 제장명 소장의 논문은 향후 고금 이충무공 역사공원 조성 및 관광자원화 사업추진과 연계되는 학술적 배경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이전에 공개된 적 없는 내용이 포함돼 지역 사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의 논문 전문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제장명(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Ⅱ.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

 이순신이 전사한 후 남해도의 잔당 소탕작전을 2~3일간 실시한 후 이순신의 영구는 고금도를 출발하여 12월 중순 경에 아산의 본가에 도착하였다. 그러므로 이순신의 영구는 11월 22일경부터 12월 초까지 10여 일 동안 고금도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린은 일본군에 대한 수색 및 소탕작전을 마치고 연합함대의 상당부분을 남해와 한산도에 머물러 두고 자신은 12월 22일에야 남해에서 고금도로 퇴진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고금도에서의 장례는 진린의 주관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조선 수군에 의해서 집안 인물들의 주도하에 치러져 바로 아산으로 운구된 것으로 보아진다.

 그 후 진린은 1599년 초에 고금도를 떠나 한성으로 향했다. 진린이 충청도 신창현에 들어섰을 때 이순신 본가에 가서 제사지내려고 했지만, 군문 형개의 차관이 일정을 독촉하는 바람에 직접 가지 못하고 백금 수백 냥을 부의로 보냈다. 그리고 아산현에 이르러 이순신의 장자 회를 만나서 위로하였다. 당시 이순신 가족은 장례규정에 따라 3개월 장을 치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과 진린은 상호 무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98년 8~9월경에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이후 전투를 수행하면서 둘의 관계는 매우 친밀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진린은 군공을 세워서 자신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순신의 협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울러 이순신의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뛰어난 전략전술 등에 매료되어 존경심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증거로 진린은 이순신의 하는 일을 기특하게 여기어 공을 반드시 이야(李爺)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도독 진린은 선조에게 글을 보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의 재주[經天緯地之才]와 나라를 바로잡은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補天浴日之功] 사람이다.

 또한 진린은 이순신의 리더십과 전략전술에 감복한 나머지 ‘공은 실로 작은 나라 인물이 아니다. 만일 천조로 들어가면 반드시 천하의 대장이 되리라.’라고 칭송하였다. 나아가 진린은 명나라 신종에게 이순신의 능력과 공적에 대해 보고하였는데, 신종은 이순신에게 도독인(都督印)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진린은 처음에는 명나라 장수들의 일반적인 성향과 다를 바 없이 군공에 집착하고 무사 안일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이순신을 압박하는 행동도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돈독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연합작전이었던 노량해전에서는 둘 사이가 더욱 친밀해졌으며, 심지어 이순신을 존경하는 마음이 충일했음을 알 수 있다.


Ⅲ. 조선 후기 진린에 대한 인식과 선양

1. 종전 직후 진린에 대한 조정의 인식
 노량해전이 끝난 후 남해 섬에 대한 잔당소탕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진린이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당시 남해에는 일본군들이 왜교에서 운반하여 쌓아 놓은 양곡이 부지기수였고 소굴에 남아있던 미곡도 매우 많았는데, 명 수군이 먼저 들어와 아무도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양곡이 산실되었다. 또한 진린 도독은 수급을 참획하는 데 급급하여 갑자기 방옥(房屋)을 불태우게 하여 3천여 석의 양곡이 소실되기도 했다. 패잔 일본군들이 대부분 남해 섬의 산이나 늪지대로 들어갔는데, 명군이 산에 불을 놓아 참획했는데, 조선인에까지도 화가 미처 그곳 백성들이 놀라 숨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손문욱(孫文彧)이 진린 도독에게 자세히 말하자, 도독이 그제서야 금지시켰다. 이 상황은 남해 섬에 백성들이 있는 것을 모르고 한 것이라 진린의 과실로 돌릴 수는 없을 듯하다.

 노량해전이 끝난 직후까지만 해도 선조의 진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예컨대 노량해전에서 대첩의 공을 세운 진린에게 선조는 윤근수로 하여금 축하의 글을 짓도록 하였다. 그런데 윤근수가 지은 글 중에 대부분이 진린의 전공을 극구 칭송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선조는 칭송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글의 내용을 못마땅하게 여겨 다시 의논하도록 하였다. 특히 선조는 진 도독이 해상의 한 차례 전투에서 승전한 것뿐이고, 흉적이 물러간 것도 애초 이 승전 때문만은 아닌데 마복파(馬伏波) 이상 가는 인물인 것처럼 했다고 한 점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선조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버젓이 범선을 타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진 도독이 유 제독(劉提督)과 함께 모의하여 몰래 화친을 약속함으로써 실제로는 그들이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 준 것으로 의심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볼 때 선조는 진린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은 듯하다. 당시 진린은 전공을 부풀리기까지 했는데, 예컨대 노량해전의 결과에 대해 이덕형이 보고한 바로는 적선 200척을 분멸시키고 100척은 도망갔다고 한 것에 비해 진린은 200척을 분멸시키고 100척은 나포하였다고 하였다. 게다가 진린은 부산에 있던 일본의 장수 도요토미 마사시게(豊臣正成)를 생포했다고 하고, 또 왜장 심안도(沈安道, 시마즈 요시히로를 말함)를 죽였다고 보고 하기도 했다.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부산에 있던 일본의 장수는 참전하지 않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투에서 사망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진린은 또한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에게 압력을 넣어서 자신이 힘껏 싸운 정상과 적 수장을 생포한 공을 군문에 보고하라고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조는 노량해전의 전공 자체도 믿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진린이 고니시를 일부러 내보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정의 접반사로 순천에서 활동하던 좌의정 이덕형이 현지에서 상경한 후 선조에게 상세한 상황을 보고하여 많은 부분 사실임을 인지하도록 하였다. 즉 수병이 대첩을 거둔 것은 사실이고 진린과 유정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모의하여 적을 보내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조의 진린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으로 바뀐 듯하다. 진린이 고금도에서 상경하여 선조를 맞이한 자리에서는 선조는 "7년 동안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이 대인의 공덕을 입고 이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진린의 공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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