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장군 가리포해전 대첩비는 완도읍 석장리 1067-2에  281㎡규모로 조성된 비석으로 지난 2005년 01월 04일 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됐다.

  최강 장군의 업적은 비문은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정리돼 있다.

  최강 장군은 전주 최공 운철의 아들로서 고성에서 1559년에 탄생하였고, 자를 여건, 호를 소계라 하였다. 1585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형(兄) 균(均)과 함께 고성(固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사천, 웅천, 진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란은 왜군의 패퇴로 끝났으나 전후에도 우리나라 서남해안에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유능한 장군을 서남해의 진에 배치하여 왜구에 대비코자 하였는데 이때 최강 장군이 발탁되어 가리포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605년 6월 8일 왜구의 대군이 제주 근해로부터 완도 앞바다의 석장포(石場浦) 왜등(倭嶝)에 침입하였었다. 이에 최강 장군은 석장포에 군졸을 매복시키고 왜선단(倭船團)을 전멸시키고자 만선(萬船)의 준비(準備)를 갖춘 후 다음 날 수군을 인솔(引率)하여 적을 석장포로 유인하여 수십척(數十隻)의 대공선(大攻船)을 적선에 치돌(馳突)시켜 이를 소각(燒却)하였고 허둥대는 왜병은 매복 중이던 우리 군에 의해 소탕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석장포에서 빠져 달아난 왜선을 최강 장군은 멀리 장수도(障水道)까지 추격(追擊)하여 나포(拿捕)하는 대전과(大戰果)를 거두었다.

  최강 장군은 이 전공으로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로 승계(陞階) 순천부사로 영전(榮轉)하였고, 이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광해조에 이르너 충청도 수군절도사와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낙향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1614년 2월 16일 졸하니 조정에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追贈)하고 의숙(義肅)의 시호를 내렸다.
1993년 2월 완도군.

   백성의 안위를 위해 장수도까지 추격해 격퇴한 것은 지역을 관할하는 장수(將帥)로서 그 책임감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이한 것은 비문에 장수도(障水道)의 장자가 가로막을 장(障)자를 쓰고 있는데,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노루 장(獐)자를 쓰고 있다. 현재 장수도의 이름은 사수도(泗水島)로 바뀌었으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에 속해 있다. 하추자도 예초리 동쪽 해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추자항에서는 동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이다. 완도군에서는 '장수도(獐水島)'라 부른다고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 장수도(사수도)는 완도군과 북제주군간 30여년 간 분쟁을 벌이던 섬이었지만 헌재가 2008년 12월 26일 “사수도의 관할권한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 분쟁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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