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완도국제해조류 박람회 성공개최 기원

'완도는 해조류 천국' 아직도 계속되는 전설
해조류는 해양치유산업의 연결고리
완도의 미래 먹거리…세계적인 산업 육성

 

믿거나 말거나 완도이야기 프로그램을 잠시 접어두고, 2021완도국제해조류박람회를 맞아 완도 해조류에 관한 일반상식을 군민과 공유하고자 프로그램을 변경했습니다. 많이 구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작가 주

 

정영래 완도문화원장
정영래 완도문화원장

  2021년 4월, 완도에서 ‘2021 완도국제해조류 박람회’를 개최한다.

  왜! 완도에서 국제해조류 박람회를 개최하는가?

  박람회는 한 나라의 문화나 산업을 소개하기 위하여 그에 관련된 각종 사물이나 상품을 진열하여 전시하는 행사이다.

  박람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성이다.

  세계해조류역사는 한국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한국의 해조류 역사는 완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옛날에 해조류는 식량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만이 해조류가 식량이 되었던 역사가 있다. 이것이 미역이다. 11세기 고려시대부터 미역은 산모의 산후 조리용으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럽에서 해양치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전에 우리조상들은 이미 해양치유의 치료법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완도에서 국제해조류박람회를 개최하는가? 에 대한 답이다. “완도는 해조류 천국”이기 때문이다.

  반도의 우리나라는 서해안의 갯벌지역과 동해안의 갯바위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남해안은 갯벌과 갯바위가 접합되는 지역 중에 서남해안에 위치한 완도는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으로 해조류육성에 세계적인 적지로 되어있다. 그래서 각종해조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한국 해조류 역사는 완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조류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전 대한제국시절, 1900년부터 완도에서는 일본으로 해초를 수출하였다. 1878년 9월 28일 우리나라에 최초로 부산에 세관(豆毛鎭海關)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방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여 현지에서 상인들이 직접 수집하여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세관을 통과하지 않은 상품의 품질이 다양하여 1906년 6월10일 목포이사청(지금의 목포시청)에서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검사를 시작하였던 것이 지금의 수산물 검사소가 생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해초 한 배를 싣고 가면 돈을 한 배 싣고 왔다.”
  완도 어르신들의 이야기다. 당시 수출을 하였던 사람은 보길도 김상근씨이다. 50여 톤가량의 목선에 발동기가 설치 되어있었으며, 당시로서는 완도에서 가장 큰 선박이었다. 그리고 고금도 김상석(완도제일다방 김현재, 부)씨는 가사리를 수집하여 죽청리 가사리공장에서 탈색 가공하여 수출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해조류 수출의 원조이며 완도해조류 초기역사이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해태(김)수출이다.

  수산물 검사소의 기록에 의하면 1918년 김 총 수출량이 137톤을 달성하고 본격적으로 생산하여 1942년 해방 전에 이미 2,723톤이 수출되었다. 이것의 90%가 완도에서 생산된 해태이다. 당시 완도는 전국에서 가장 잘 살았던 곳이다. 농업소득 외에 아무것도 없던 시절 완도에서 생산된 해태는 15만 군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1962년 2월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완도대교가 개통되었다. 당시 완도대교는 부의 상징이었다. 

  이것이 완도에서 국제해조류박람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가 되었으며, 해양치유산업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완도군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해양치유산업은 완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세계적인 산업이 될 것이며, 미래 완도를 세계 제일의 부자 군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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