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군 설군한 이도재 공 업적을 기리다
1886년 고금도 유배형. 향유들과 교유 극진한 존경
1896년 19개 면으로 완도군 설군. 각 도서 대표와 완도군면 등 결정

  이도재공의 적거는 고금면 덕암리 941-1에 위치한 초가집이다. 704㎡의 부지에 마련된 이 초가집은 지난 2003년 11월 24일 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됐다.

  완도군 향토문화유산 1호로 지정된 이유는 적거지(謫居址)의 구조와 가치에 둔 것이 아니라 완도군을 설군(設郡)한 이도재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상징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현재 적거지는 지난 2007년 복원해 보존 관리하고 있다.

  이도재(1848~1909)의 자는 성일(聖一), 호는 호는 심재(心齋)·운정(篔汀),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아버지는 이명익(李溟翼)이었으나 이건익(李建翼)에게 입양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35세에 문과에 급제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호군(護軍)직에 있다가 사대당(事大黨)의 전횡에 휩쓸려 1886년 강진현 고금도로 종신 유배형에 가극안치(加棘安置)되었다. 안치(安置)는 일정지역 범위를 설정해서 그곳에서만  살도록 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가택연금에 해당한다. 안치에는 외로운 섬에 가두어 두는 절도안치(絶島安置), 집에 울타리를 둘러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덤불을 둘러쌓아 외부출입을 막는 가극안치(加棘安置)가 있는데, 사형을 제외하고 가장 중한 형벌에 해당한다. 안치 중에서 가장 편한 것은 본인의 고향에서만 생활하게 하는 본향안치(本鄕安置)가 있다

  한편 이도재는 유배 중 도민의 교화와 계도(啓導)에 주력하면서 시문과 서예, 바둑 등으로 향유(鄕儒)들과 교유하며 지역민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면서 해배(解配)됐고 공무협판으로 군국기무처의원(軍國機務處議員)이 됐다가 곧이어 전라도관찰사겸 위무사(慰撫使)로 부임했다. 그 해 12월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을 순창에서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그렇게 동학혁명을 수습한 후, 고금도 적거시 교유했던 김규원(金奎源, 초명 상철, 자 광선(光善)) 등 지방유지 수 명을 전주로 불러 말하기를 “금번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기회에 여러분의 갈망이요, 염원인 남해일대 도서들을 합하여 일군(一郡)을 신설키로 했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앞으로 설군에 관한 상의차 본인이 고금도에 내려가겠으니 그리 알고 여러분은 돌아가십시오”하고 작별했다.

  이듬해(1895년, 을미) 봄에 고금도에 내려와 민정을 살피고 세미고(稅米庫)를 열어 기민(饑民:굶주린 백성)에게 전달하고 각 도서 대표를 덕동으로 소집시켜 군의 명칭과 군청 위치 등을 자문, 군명은 완도군, 위치는 가리포진지로 결정하고 귀영(歸營)한 후, 그해 10월에 이 감사가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영전됐고 곧이어 학부대신(學部大臣)으로 전임된 후, 1896년(병신) 4월에 초대 군수인 이규승을 완도에 부임케 했으며 5월 15일 가리포진의 객사(청해관)에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각 도서의 호구 및 결수조사, 향교의 신설, 각 면장의 선임(민의에 따라 할 것) 등 전부 10개 항을 결의했다.

심재 이도재 / 사진=이도재 후손 제공
심재 이도재 / 사진=이도재 후손 제공

   학부대신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발령이 강행되자 이에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고 사직했다.

  이도재 공은 이후 1896년 동로선유사(東路宣諭使), 중추원의관, 궁내부특진관, 외부대신·비서원경(秘書院卿), 농상공부대신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898년 10월에는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건의를 들어 한성의학교 설치를 인가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학 교육기관을 세웠다.

  정치가 혼란했던 시기를 반영하듯 그의 직책은 또 다시 부대신서리·궁내부특진관,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 법부대신, 고등재판소재판장,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귀족원경, 평안북도관찰사, 시종원경(侍從院卿)·궁내부특진관, 홍문관학사, 육군부장(陸軍副將)으로 철도원총재, 외부대신, 평안북도관찰사, 충청남도관찰사, 내부대신·표훈원의정관(表勳院議定官),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했다.

  1906년 8월 이도재 공은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태극장(太極章)을 서훈받게 되며 그 후 장례원경·시종원경에 임명됐으나 1907년 7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을 받아 박영효 등과 함께 나문정죄(拿問定罪: 죄인을 잡아 신문하고 죄를 판단해 결정함) 당했다. 이때 후유증 탓인지 이도재는 1909년에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도재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 이 공의 공적을 완도 군민들이 기억하고자 1987년 1월 24일 완도군민회관 광장에 군민 일동의 이름으로 재상(宰相) 이도재 공의 창군공적비(槍郡功績碑)를 세웠고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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