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영전진도첩(右水營戰陳圖帖)
조선후기 우수영의 조직과 작전 수행 한눈에...

▲우수영전진도첩. 도첩의 표지에는 '이순신장군 전진도'라고 표기돼 있다.
▲우수영전진도첩. 도첩의 표지에는 '이순신장군 전진도'라고 표기돼 있다.

 우수영 전진도첩은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337에 소재한 고금도 충무사에 보관 중인 자료로 지난 1988년 3월 16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지정됐다.

 우수영은 조선시대 전라도와 경상도에 설치한 수군의 진영으로, 이 전진도첩은 접이식 책자 형태로 만들어져 1매 14쪽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라우수영의 군사 조직과 운영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이며, 어떤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있다.

 수록된 내용은 적과 만났을 때 대처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묘사한 예진도와 직진도,하방영도, 도진도, 곡진도, 학익진도, 일제향전도, 열자진도, 좌우 이로행도, 청발방도, 군선기호, 나팔취음, 기타 1780년 이전 고수영 작대, 1781년 개작대 등 15개 사항이다. 도첩의 안쪽에 정조 4년(1780)에 수군편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780년 이후 작성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라우수영의 군사조직과 운영실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지금까지 전남 해안 지역에 산재한 좌우수영 예하의 진․ 성들에 대해서는 간략한 연혁이나 현존 유적의 조사가 고작이었고 그 계통 조식만 이해된 수순이었던 것에 비해 이 자료는 실제 조선후기 우수영이 어떤 조직과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학익진도(鶴翼陣圖)로 『우수영전진도첩(右水營戰陣圖帖)』의 6번째 그림이다.

 학익진은 일오횡대의 일자진(一字陣) 형태로 대기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중앙의 부대는 뒤로 물러나고, 좌우 측의 부대가 앞으로 나아가며 적을 반원 형태로 포위하면서 화력을 집중해 공격하는 방식의 진법이다.

 이 진법은 반원 형태의 모양이 학의 날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육상 전투와 해상 전투에서 모두 사용됐던 진법으로, 기동력이 뛰어난 부대 즉 기병(騎兵)이나 전선(戰船)들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에서 사용되면서 그 진가가 널리 알려졌고 이후 이순신 장군을 이야기할 때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진법이기도 하다. 서양 군사학에서는 이를 통상 ‘망치와 모루 전법’이라고 한다.

 병력은 열세였지만 선체의 능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이었던 조선 수군이 다수의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군의 능력과 상대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지휘관의 탁월한 정보력과 운용능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전매특허이자 천하무적으로 보이는 이 학익진법이 임진왜란 당시 기록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학익진 사용례
임진왜란 기간 중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장계에서 학익진이 언급된 사례는 현재까지 단 세 차례만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해상 기동 중 전투대형을 언급한 사례는 <임진장초 만력 20년 6월14일자 계본 견내량파왜병장>, <임진장초 만력 22년 3월10일 당항포파왜병장>을 제외하면 전투 시 학익진을 운용한 사례는 한산도대첩에서만 확인된다. 『참고 1』

<참고 1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21일>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아군진퇴유인, 적과실중추지, 인출우한산전양。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아군파열위학익진, 휘기고조, 일시제진, 연방대소총통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선파적선삼소, 적기좌소각, 제장군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했고,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한편 그 외에 진법이 전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난중일기와 장계에서 학익진과 장사진 뿐이다. 화차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육군의 변이중도 학익진을 사용해 교전한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 외에 다른 수군 장수가 임진왜란 중 학익진을 사용한 기록도 한 차례 있는데, 그 사용자는 이순신 장군이 해임된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원균은 그 학익진을 실제 운용해봤고 경험도 많았으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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