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면 대평마을

신지 대평마을은 면소재지로서 한때 군내에서도 가장 살만한 마을이었다.

완도가 그렇듯 신지도(薪智島) 역시 산업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섬에서 육지로 변모했다. 섬이 연륙되면서 생활도 변했다. 신지가 섬이었을 때 신지 주민들은 땅보다는 바다에 의지해 살아왔다. 섬 내의 농토가 비좁고 척박한 반면에 해초와 어패류가 지천인 갯뻘과 바다는 항상 풍성한 생활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 신지도에서 가장 넓은 들을 가진 대평마을은 험한 바다보다 기름진 농토를 기반으로 농업을 주업 삼아 사는 주민이 많았다. 벼농사와 콩농사, 마늘농사를 지으면서 때때로 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부업으로 해 소득에 보탰다. 해방 전에 축조된 대평저수지는 기름진 들에 심은 곡식들을 잘 키워주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주민들의 생활도 꽤 넉넉한 편이었기에 향학열도 높아 근동에서는 학자와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를 많이 배출한 마을로 꼽히고 있다.

대평마을은 마을 뒤편 동북 방향으로는 노학봉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 명사십리의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상 마을은 대평리(大平理)로 속하지만 자연부락은 챌등, 한들(大平), 샘골(泉谷), 땅골(當谷), 울몰(永洞) 등으로 구성돼 있다. 마을마다 위치한 지세가 달라 농사가 주업인 대평과 달리 명사십리 동쪽 끝자락에 연한 울몰은 어업이 주업이며, 일부 주민은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마을 어른인 정동채(80세) 전 신지면번영회장에 따르면, 대평마을은 1660년 이후 청주한씨가 처음 이주해 마을 이루었다. 마을 어른들에 따르면 들이 너른 대평마을은 1660년 사복시(司僕侍) 감목관(監牧官)이 챌등에 주둔했다가 1677년 해적들 등쌀에 제주로 옮겨갔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마을 인근 야산에는 당시 축조한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국진체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 선생 선생과 경평군 이세보가 신지로 귀향을 와 살았던 것도 대평리 땅골과 울몰이다. 과거에는 임씨와 황씨, 박씨와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가장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김씨, 서씨, 황씨 순이라는 것이 노인회장 강광열 씨의 설명이다.

또한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대평 챌등에 면사무소가 신축되면서 이후 대평리에는 우체국, 농협, 수협, 신지명신학교, 버스 정류장 등이 나란히 들어섰고 신지면 소재지로서의 위상도 갖추게 됐다. 당연히 신지면의 돈이 이곳 면 소재지인 대평마을로 흘러들어 한때는 군내에서도 어디보다 살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다 옛 이야기일 뿐이다. 여성이장인 정광순(57세) 씨는 "160가구인 대평마을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20가구도 안 돼 반농반어라는 말도 안 맞는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16가구 중 130호가 65세 이상 노인들이어서 대평마을이 빈촌이 됐다.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잘 사는데, 토박이 마을사람은 다 그렇다."고 말했다.

대평저수지 아래로 펼쳐져 있는 한들은 그대로인데, 울몰 인근으로 고급 펜션이며 모텔 등 화려한 건물들은 해마다 늘어만 가는데, 마을은 왜 쇠락해졌나. 왜?

대평마을은 앞 저수지 아래 펼쳐진 한들은 대평마을 주민들이 의지해온 삶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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