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교(현)완도군 문화관광해설사, 전)완도군청기획예산실장)

완도에는 "강아지도 500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 는 말이 한때 유행 했었다.

청정바다의 수도인 완도는 국제해조류박람회를 개최할 만큼 우리나라에서 해조류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완도는 바다의 채소라고 부르는 김, 미역, 다시마, 톳, 매생이 등 해조류 주산지로서 “김” 하면 완도, 완도 하면 "김"으로 유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김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사람들이 완도에 해태양식시험소를 설치하여 운영하면서 양식기술이 보급되었으며 1917년 11월 19일 총독부령 15호에 의거 완도해태조합이 설립되어 일본으로 김(해태)을 수출했지만 이때는 수탈의 수단이었으므로 제값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965년 6월 22일 국교를 수립하고 1966년 3월에 한일무역협정이 체결되면서 완도산 김(해태)의 90%가량을 일본으로 수출하게 됐다.

이때 수출품 김을 수집하는 단체는 어업협동조합이었으며, 품질검사는 수산물검사소에서 담당했다.

어가에서 수출품 김을 제조할 때 조합품을 만든다고 표현했으며 국내 시판용은 밀매품이라고 말했다.

1967년도에 5,129,988속을 생산하여 97%를 일본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에 수출품 김 한속(100장)의 가격은 2,000~3,000원​ 이었으며, 국내 시판용 가격은 수출품의 10분의1 가격인 200~300원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무렵에 『완도에 가면 강아지도 5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왔다

고금면의 경우 고금어업협동조합이 수출용 김을 위탁 받아 수매한 장소는 여객선 귀항지인 연동리 마을과 덕동리 마을에 위판장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들 마을은 면소재지 마을처럼 음식점 영업도 활발한 지역이었다.

당시 최 고액권 화폐는 500원짜리 지폐였으며, 1962년 화폐개혁으로 500원짜리가 처음 발행됐고 1966년 8월 17일 신 500원짜리 지폐가 발행되어 시중에 대량 유통된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

1966년 겨울 어느 날 고금면 상정리 마을에 사는 손○○씨가 수출용 김(해태) 한 궤짝(100속가량 들어가는 나무상자)을 짊어지고 연동리에 있는 어협 위판소에 가서 김을 위탁 판매하고 받은 돈은 약 25만원(500원 권 지폐 다섯 다발)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서 위판(위탁판매)을 마치고 많은 돈을 수령한 손○○씨는 점심때 연동리 마을 모 식당에서 당시 고급 안주인 생두부와 돼지고기에 막걸리(술)를 한 되 쯤 마시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상정리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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