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흥포 간척지구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완도 체도 내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지금은 다 흘러간 옛이야기가 됐지만, 화흥포구 앞이 푸른 바다였던 시절 이 포구 주변의 마을들은 지주식 김양식과 투석식 굴양식으로 완도 군내에서도 어느 곳 못지않게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화흥포 주변 마을 중 대구미(大口味)의 옛 지명이 한구미, 곧 커다란 구미(강이나 바다의 곶)란 뜻인 점이나 화흥리(花興里)와 화개리(花開里)의 이름에 든 ‘화(花)’ 자가 굴의 다른 이름인 ‘석화(石花)’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곳 주변 마을 주민들은 사라져버린 화흥포에 오롯이 기대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화흥포의 간척사업은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경지로 크게 줄어들자 정부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내놓은 서남해안 간척사업에 따라 추진됐다. 이때 화흥포는 1987년 착수된 약산면 간척사업, 1992년 착공된 고금지구 간척사업과 함께 단행됐다. 1989년 12월부터 시작돼 1998년 12월까지 약 10년 세월 동안 약 360억 원이 투입돼 진행된 사업으로 화흥포 일대 바다는 392ha의 땅으로 메워졌고, 185ha의 농경지와 158ha의 담수호(화흥호)로 다시 태어났다.

화흥포 일대의 주민들은 바다를 농경지로 바꾸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대다수 주민들은 겨우 몇 백만 원 정도에 불과한 보상금과 185ha 274 필지의 농경지분양 조건에 따라 간척사업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때 지급한 농경지 매각대금이 60억 3천 200만 원이었다.

그러나 1천 평에서 1천500평의 간척지 농지를 분양받게 된 이 지역 농민들은 매일처럼 가슴을 치며 지낸다. 이들의 오늘날 삶은 군내에서도 가장 피폐해졌고, 해가 갈수록 마을 공동화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원인은 한 가지, 화흥포를 잃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잃은 주민들은 김양식에 이은 미역양식도 톳이나 전복양식도 다 남의 일이 되었다. 화흥포 끝자락에 화흥항이 만들어져 국가 지정 연안항으로 지정됐으나 이도 사실은 허울뿐인 항구이다.

그 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화흥포 매립에 따른 영향 권역이라 해 당시 보상과 농지 분양 자격을 대구미와 화흥리, 화개리는 물론 대신리와 정도리, 중도리, 사정리 등 7개 마을까지 포함했으나 대구미와 화흥리, 화개리를 제외한 4개 마을만큼은 어장 대부분을 잃지 않고 보존해 여전히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으니.

잊지 말자. 이제 누구라도 우리들의 터전인 바다를 빼앗으려는 사탕발림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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