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우리섬> 완도읍 대야리

단풍이 물든 대야2구의 마을 전경.

완도읍과 군외면의 경계를 이루는 대야리는 1구와 2구로 나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청해진 시절에 이곳에 청빈관이 있었던 곳이어서 청빈리가 와전돼 청비리, 또는 청천리라고 불리게 됐다고 말한다.

대야리는 1855년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될 때 인근 대수골과 합하여 처음으로 면소를 두게 됐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외면이 남북으로 분계되자 대야리는 자원해 군외면에 편입 됐다. 이때 대야리에 있던 면소가 군내리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오랜 시간 대야리는 완도내면의 관문으로서 5일장과 인근 섬을 오가는 나루터이자 체도의 중심 역할을 했었을 것이다.

옛 문헌에 대야리 1구는 1655년 효종 때 안동장씨, 김해김씨, 함안조씨가 당쟁을 피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고, 대야리 2구는 1680년 숙종 때 경주김씨와 진주강씨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운봉과 건드렁바위 아래로 골이 깊어 대수골에 이르는 계곡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데 이것을 지칭해 구십구곡수라 부른다. 길이 4.7km에 이르는 대야천의 이 물줄기를 막아 1975년에 축조한 대야리상수원과 그 하류에 세운 대야저수지는 일급 상수원으로서 평가받고 있으며, 수원지 일대 대수골의 분지가 세수하는 대야(大也)를 닮았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대야리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대야리는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호구총수’에서 ‘청비내리(淸飛乃里)’로 기록돼 있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청비리라는 이 이름을 더 즐겨 쓰고 있다.

기름진 대야리의 한들.

대야리 2구에서 대창리로 연결되는 120m 높이의 질매재는 장터를 오가는 동부 주민들의 주요 길목으로 이용됐던 곳이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재미있는 전설 중에서는 대수동 마을 앞 대야천 하류에 있는 깊은 못인 용둠벙(또는 용방죽)에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고, 용둠벙을 지나던 도사가 깊이를 짚어보다가 빠트린 지팡이가 멀리 떠내려가 솟아올라 주도의 황금목으로 자라났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장터마을 앞 작은 동산인 조산(鳥山)에는 당할머니를 신주로 모신 조산당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정월 보름에 제를 모시고 있으며, 이 조산 부근에 새로 조성된 마을을 새마을동이라고 부른다.

대야리에는 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사우도를 오가는 도선장이 있으며, 완도군 농업기술센터의 시험포장이 들어서 있다. 이 시험포장이 자리잡고 있는 넓은 들판이 바로 ‘한들’이다.

특히 대야리 주민들이 공동어장으로 관리하고 있는 마을 앞 개펄은 굴과 바지락 양식장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춰 해마다 많은 양의 굴과 바지락을 채취하고 있어 주변 마을로부터 크게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내만의 바다에서 캐는 바다바지락도 맛과 씨알이 좋아 꽤 높은 값에 팔린다.

70년대 수출용 김을 양식해 큰돈을 벌던 마을 주민들은 이후 미역양식으로 전환했다가 최근에는 노령화 등으로 전체 주민 중 약 10% 정도만 어업에 종사할 뿐 대개는 농업을 주업삼아 살고 있다는 게 대야리1구 이장 이근수씨의 설명이다.

어업에 종사하는 비교적 젊은 어민들은 전복 치패와 광어 양식, 통발 등에 종사하고 있으며, 마을 규모는 1구가 145세대 2구가 약 70여 호에 달한다.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육상양식장에서는 광어를 양식해왔으나 광어 시세가 안 좋아지면서 요즘엔 전복 치패를 양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야리가 한때 완도 내면의 중심이었던 것도 넓고 비옥한 땅과 풍부한 용수, 천혜의 어장을 곁에 두고 있는 마을의 여건이 여러모로 작용했을 것이다. 단풍진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볼수록 대야리의 넉넉한 환경이 한껏 마음을 끌었다.

 대야1구 마을 전경. 멀리 청해진 유적 장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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