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우리섬…⑥신지면 송곡마을

 

신지면 송곡리(松谷里)는 1630년경 조선 인조시대에 김해김씨가 처음 입주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송곡리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진리(鎭里)라고 불리다가 수군진이 철폐된 이후 마을 인근에 소나무가 울창한 데에서 따 송곡(松谷)으로 마을 이름을 바꿔 불렀다고 한다. 수군만호진은 청산도에서 옮겨왔다. 뿐만이 아니라 송곡리는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들이 막사와 병기고, 포대, 화약고 등을 설치한 일종의 병참기지가 세워지기도 했던 곳이어서 여러 시대에 걸쳐 군사요충지로서 평가받았던 땅이다.

송곡 마을은 주변 지형 때문에 북동향으로 앉았지만 앞으로 강진땅과 고금도가 가려주고 있어서 남향을 하고 있는 섬 내의 다른 마을보다 안온한 땅이다. 실제로 심한 태풍이 몰아쳐도 크게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곳이라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마을 북동쪽에 위치한 송곡항을 중심으로 풍성한 바다를 끼고 앉은 송곡리는 옛날부터 멸치잡이와 해조류 채취로 풍족하게 살았던 편이라는 게 3년째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이길수씨의 설명이다. 생활하고 있는 주민 수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현재 주민등록상 등재된 마을주민은 202호. 인근 읍면에서도 보기 드물게 규모 있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역사속 송곡리는 지석영의 유배지이자 항일운동가 장석천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정약전도 흑산도로 가기 전 이 마을에 머물며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비스듬히 앉은 마을 뒤편 언덕에는 아직도 1887년 갑신정변에 휘말려 유배 와 5년 동안이나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천연두 예방접종 인 종두법을 보급하고, <신학신설>을 편찬해 예방의학을 보급하는 한편으로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조선말의 문신이며 의학자, 국어학자인 지석영이 거주했던 집이 남아있다. 그의 호 송촌(松村)도 이곳에 거주하면서 취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인연을 중하게 여겨 요즘 주민들은 빈집으로 남아있는 지석영 유배 가옥을 사들여 보존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논의 중이다.

1903년 송곡리에 태어난 민족민중운동가이자 항일운동가인 장석천은 이곳에서 유년시절과 초등학교를 마쳤다. 수원고등농림학교 2학년인 장석천이 수원고농 동맹휴학을 이끌고 이후 조선학생회와 광주청년회, 광주청년동맹, 전남청년연맹의 중심에 서서 광주학생시위를 주도한 것은 일제하 항일 청년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때문에 신지도 항일운동사를 논할 때 장석천은 늘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주요 인물이다.

시대가 변하듯 마을도 변천한다. 오늘을 사는 송곡리 주민들은 우럭과 돌돔을 주어종으로 하는 가두리양식과 미역과 톳 양식을 주업 삼아 넉넉하게 살고 있다. 소득 수준이 말해주듯 마을길은 넓고 주택들도 크고 화려한 집이 많다. 일찍부터 미역양식과 가두리양식을 시작한 주민들의 소득수준은 매우 높은 탓이다. 우럭은 흑산도 자연산 치어를 가져 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특히 마을 앞 바다 위에서 양식되는 돌돔 같은 경우에는 “없어서 못 팔정도”라는 것이 이길수 이장의 설명이다. 마을주민 중 가두리 양식을 하는 가구는 17가구로 1990년대 34가구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새끼줄을 꼬아 미역양식을 할 정도로 오래 전에 시작한 미역과 톳 양식은 대다수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송곡리는 고금면과 약산면을 완도읍과 연결하는 바닷길목이다. 뭍에서 고금과 약산을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로 사철 어느 때나 늘 붐비는 이 송곡리 한 쪽에서는 지금 고금 상정과 송곡을 잇는 신지-고금 연륙교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아직 채 끝나지 않은 어업권 보상 문제나 토지 매입과 관련한 미제들이 남아 있으나 연륙교공사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때문에 오는 2017년 연륙교가 계획대로 준공되면 송곡마을은 원하지 않아도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렇다면, 송곡마을의 내일은 또 어떻게 변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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