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농가에게 완도농업을 묻다/ 남선리 부지화농장 김여동씨

“바다농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육지농사 중 최고는 역시 과수농사입니다. 특히 특화작목을 잘 선택해 하우스재배를 한다면 안정적이고 높은 소득을 거둘 수 있어서 젊은이나 귀농인들이 도전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군외면 남선리(벌꿀마을) 한라봉(부지화)농장에서 만난 김여동씨(74세)는 농사의 어려움을 말하기에 앞서 농업의 가능성과 희망을 먼저 말했다. 김씨가 농사일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65년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하면서부터라 한다. 꼬박 50년을 농사를 지어온 셈이다. 그 사이 김씨는 한때 9년 경력의 새마을지도자 경력을 인정받아 군외면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또 김양식도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벌꿀마을 앞 내만에서 지주식 김양식이 잘 되던 시절에는 농업과 어업을 겸했던 것이다. 내만의 김양식이 도태되자 소득원을 찾던 그는 1968년 정부가 ‘대학나무’로 불리던 유자를 권장하자 유자재배에 매달렸다. 한창 때 유자과수원은 그 규모가 6천 평에 달했다. 가격도 처음 몇 해는 10kg 한 상자에 6~12만원에 내다팔 정도로 시세가 ‘금값’이었다고 한다. 고소득 작목 재배기술을 보급한 공로로 ‘새농민상’을 수상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과수농사도 시장 상황에 따라 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95년부터는 유자 가격이 폭락해 운반비도 건지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됐다. 정부의 권유로 대량 식재한 유자가 본격적으로 수확되면서 가격폭락세가 멈추지 않자 재배농가들은 유자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김여동씨는 유자 고목에 한라봉(부지화)을 접목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2001년도의 일이다. 현재 600평의 시설하우스에서 재배하고 있는 한라봉농장이 바로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유자 대목을 모두 파내고 탱자나무에 접붙여 다시 시작해 이룬 그의 터전인 셈이다.

품질 고급화를 위해 무농약으로, 그리고 다시 완전한 유기농으로 전환한 600평의 한라봉 농장 외에도 경기도 농업기술센터에서 일하던 아들을 불러들이고, 아우의 힘까지 더해 해변포도밭도 노지 2천300평, 하우스 1천200평과 유자 3천평의 과수농사를 짓고 있다. 최근에는 딸까지 나서 남선리 농장 곁에 유자차 가공공장을 만들면서 서울에서 미래과학부 공무원으로 일하는 둘째아들을 제외한 온가족이 농사일에 나서게 됐다. 주변 모두가 그를 완도 만감류의 선도농가로 꼽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김여동씨는 “한라봉을 처음 재배할 그 무렵에나 지금이나 판매가격은 3kg당 4만원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설하우스 평당 설치비용이 그 당시에는 8만원이었던 것이 22만원까지 올랐는데도 농산물 가격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김씨는 “포도농사가 손이 제일 많이 가는 농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작목인 것이 자기가 생산한 것을 집 앞에서 쉽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 작목’이라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농산물을 직접 판매하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작목이 없다고 보았다. 농민이라면 재배기술 습득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포도도 한라봉 등 만감류도 비가 많이 오면 수정이 잘 되지 않고, 수분이 증발해 과육이 터지기 마련이므로 비가림 시설을 갖추는 등 각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데 이런 세세한 부분에는 많은 농민들이 무심하다는 것이다. 철저한 선별작업도 농사를 잘 짓는 것만큼이나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농산물도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농사도 경쟁에서 이기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그는 지금도 제주도에서 신품종인 ‘사과34’ 등을 들여와 이식을 하고 있다. ‘농사도 경쟁에서 이기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뒤떨어져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여동씨는 “농사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젊은 농군들이 너무 서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최근 심장판막 수술을 하는 등 건강이 나빠져 “잠자는 시간 빼고는 늘 술을 마셨다”는 그는 “맛있는 술도 못 마신다”고 한참을 웃은 뒤에 “요즘엔 쉬엄쉬엄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급증에 걸린 듯한 젊은이들을 향하여 ‘농사는 열심히 하되 급하게 결실을 맺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래도 소득을 빨리 내고자 서두르는 젊은이들에게는 고소득 작목을 잘 선정해 시설하우스재배에 나설 것을 권유한다는 것.

김씨는 “농사가 재료비, 유통비, 인건비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욕심을 내지 않으면 정성을 쏟고 일한 만큼 소득을 낼 수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남이 돈 벌었다는 말 듣고 따라했다가는 망하기 일쑤인 것이 농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귀농한 사람들이 찾아와 조언을 물을 때마다 매번 그가 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조언 내용에 대해서도 밝혔다. 자신의 소질이 무엇인가? 건강은 어느 정도인가? 자금은 얼마나 되는가? 이 세 가지를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귀농해 한라봉 묘목 생산을 하려는 사람과 머루 과수원을 꿈꾸고 찾아온 또 다른 귀농인에게 이렇게 되묻고, 여기에 더하여 완도의 토질과 기후 등 몇 가지 지역 영농 여건과 경험 등을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귀농인들을 살뜰히 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완도에 많이 들어와야 지역이 발전할 수 있고, 지역농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귀농 예정자들이 땅을 구입하려고 문의하면 늘 시세보다 턱없이 비싸게 불러 귀농을 어렵게 만드는 현실에 대해 “안타깝다”며 개탄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인데…”라고 들릴듯 말듯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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