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우리 섬> 완도읍 망남리(본낭구미마을)

망남(望南)마을’은 1552년 완도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치된 때부터 왜구들의 침탈을 경계하는 수군 조망대가 있던 곳이어서 ‘남쪽을 망보는 구미’라는 의미의 본남구미(望南)라 불렸다고 한다.

참 따뜻하고 포근한 마을이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완도읍의 중심인 군내리 1구에 속했던 망남리는 본래 ‘본낭(남)구미’ 또는 ‘본낭기미’라 불렀다. 최근 들어 전국의 지번이 모두 도로명주소로 바뀌었지만, 완도읍 군내리 1번지가 이 마을에 있다. 1, 2, 3, 4구로 나뉘었던 완도읍 소재지 내 군내리의 남쪽 시발점이 본낭구미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망남리는 1805년 청산면 상서리에 살던 임두남씨가 목화장사를 위해 목포, 여수, 원산 등지로 항해하던 중에 심한 풍랑에 배가 파손돼 표류하다가 이곳 해안가에 밀려왔다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지명에 구미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은 동망산 일출전망대 남쪽 방향으로 작은 만(灣)을 이룬 양지바른 곳에 동서 횡으로 터를 잡고 앉아 있다. 또 본 마을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한 구비를 돌면 1980년대 이후 몇 가구가 새로 이주한 ‘새마을부락’이라 불리는 작은마을이 바닷가에 형성돼 있어서 마을의 규모가 최근 30년 사이 제법 커졌다.

마을의 지명이 남쪽을 바라본다는 의미인 ‘망남(望南)마을’은 1552년 완도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치된 때부터 왜구들의 침탈을 경계하는 수군 조망대가 있던 곳이어서 ‘남쪽을 망보는 구미’라는 의미의 본남구미(望南)라 불렸다고 한다.

군내리에서 망남리로 넘어가는 본낭구미재와 동망산 인근에 일출공원이 조성될 정도로 마을 일대는 완도읍내에서 일출을 보기에 최적합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에 조성된 펜션은 한 번 이용했던 외지 사람들이 주변 경치에 반해서 다시 찾는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마을 일대는 완도읍 주민들이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고, 완도읍 소재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해마다 해양수련회 장소로 이용하는 등 여름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이기도 하다. 본낭구미마을 인근 해안에는 개머리, 섬목섬, 소진바구, 말똥바구 등 기이한 형상의 갯바위와 지형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일출을 맞이하고 분주한 생활에 찌든 심신을 달래기에도 적합한 이 어촌마을을 찾는 외지인들이 차츰 늘어나는 추세이다.

대대로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망남리는 1970년대까지는 말목을 갯뻘에 박아 양식하던 지주식 김양식에 의존해 살았다. 이후 90년대까지 미역양식을 하다가 지금은 대다수 마을 주민들이 전복양식을 주업 삼아 살고 있다. 전복 생산량이 많다보니 전복 치패양식 및 유통 등에 종사하는 사람도 상당수에 이른다. 취재 중인 26일 오후에도 선착장에서는 전복 선별과 출하작업이 한창이었다.

조류 흐름이 좋은데다가 작은 내만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전복양식 조건으로 망남리. 한때 농토가 부족해 가난한 어촌마을이었지만, 지금 망남리는 완도읍 일대에서 전복양식을 가장 많이 하는 선진어촌, 부촌으로 변모해 인근 마을 주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소득이 높은 때문인지 깔끔하게 정리된 고급 주택들도 제법 많이 들어서 있다.

마을주민 이윤식씨(66세)는 “농토가 적어 식량 자급자족은 못 해도 돈은 풍족하게 쓰면서 산 동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볼라벤 태풍만 아니었다면 마을주민들이 꽤 큰돈을 벌었을 텐데 10년 가까이 벌어서 재투자만 했다가 태풍으로 다 잃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동안 먼 바다를 바라보던 그는 “태풍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고, “대기업들은 공적자금까지 쓰면서 도와주던데, 어민들에게는 5천만 원 갖고 뭘 어쩌라고 하는지…”라면서 다시 한숨을 토했다. 이럴 땐 태풍을 원망해야 하나, 바다를 원망해야 하나. 속절 없이 가슴이 아프다. 아름다운 어촌 망남리, 풍요로운 바다를 품은 본낭구미가 하루빨리 활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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